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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죄 많은 소녀, 박화영, 살아남은 아이, 소공녀, 이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한국영화 가운덴 유독 10대와 20대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많았다. <한국영화>는 그중 <죄 많은 소녀> <박화영> <살아남은 아이> <소공녀> <이월> 등 5편에 주목했다. 이들 영화가 포착한 이 시대, 청년세대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둘러본다. 쉽게 희망을 말하기보다 절망을 직시하는 이야기들이 여기에 있다.


ⓒ글·이주현 <씨네21> 기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화제의 한국영화들엔 유독 10대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았다.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 이환 감독의 <박화영>,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는 폭력적 상황에 내몰린 10대들을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변호한다. 특히 그 변호 방식이 흥미롭다. 이들 영화는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그린 10대 성장영화가 아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미처 다 성장하지도 못한 채 어른과 맞서거나 잔혹한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집과 학교 는 유명무실한 안전 펜스. 또래집단 역시 친구와 적 사이를 오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제 삶을 온전히 혼자서 책임진다는 의미라면, 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에겐 손 내밀어주는 어른이 없다.


한편 떠밀리듯 어른이 된 청년세대에겐 집이 없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와 김중현 감독의 <이월>은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여기서 의 절박한 상황이란 이들에게 집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발뻗고 몸 누일 곳이 없다. <소공녀>와 <이월>은 집이 없어 포기해야 하는 것과 집이 없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청년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시대에, 영화는 직업이 아닌 집이 없는 인물을 통해 어쩌면 지금의 현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한편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의 주인공도 집이 없어 여자친구의 집을 전전하는 이야기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영화 중 3편이 집 없는 떠돌이 어른이 주인공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참담한 현실, 담담한 어조


<죄 많은 소녀>는 고등학생 경민의 실종 사건에서 시작된다. 실종은 곧 자살로 밝혀지고, 경민의 부모와 친구들은 경민과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영희에게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전가한다. 영희에겐 물론 죄의식을 느낄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영희가 특별히 더 많은 죄책감을 짊어져야 할 행동을 한 건 아니다. 그저 어쩌다 희생양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영희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한다. 그리고 목소리를 잃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된 소녀는 그러나 꿋꿋이 복수를 계획한다.


<죄 많은 소녀>는 거대한 회색지대를 통과하는 영화다. 인물의 진심은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진실을 가리고 있는 안개는 걷힐 듯 걷히지 않는다. 순수한 의도와 불순한 의도 사이,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사이를 거닐며 영화는 제자리걸음 같은 걸음으로 발을 구른다. 경민의 죽음이 자살이란 것이 드러나자 교장은 학교의 ‘입장’을 생각하라며 선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럴듯한 답을 내놓으시죠.” 정확한 답이 아닌 그럴듯한 답을 요구하는 학교(혹은 사회)라는 회색지대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임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리고 하나 같이 자신이 결백한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그건 능숙한 연기다.


거기서 비극은 시작되고, 죽음은 가벼운 농담처럼 소비된다. 이 영화가 그리는 섬뜩한 세계에서 친구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없다. 친구들은 화장실에 모여 화장을 고치며 얼마 전 눈감은 친구의 자살을 연예인 뒷담화하듯 떠든다. 영희의 집에 떼로 몰려간 친구들이 단죄하듯 영희에게 발길질을 해대고 커터칼을 들이미는 것도 어쩌면 결백하지 못한 자가 결백을 위한 알리바이로서 행한 과장된 연기일지 모른다.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가해자가 돼야 하고, 다수의 편에 재빠르게 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10대 아이들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학생의 죽음을 1/n의 죽음으로 치부하는 선생들의 태도만큼 살벌한 건 이 같은 10대들의 영악한 처세다.


그 세계에서 어쩌면 영희는 순진했다. 경민과의 마지막 시간을 추궁하는 어른들에게 영희는 말한다. “나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저 다리 위에서 뛰어내릴 거야. 나도 죽고 싶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이 위로가 될 줄 알았어요.” 그 화법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위로처럼 보인다. 영화에는 마음과 마음이 전해지는 장면이 거의 없다. 우정이나 사랑은 머물다 가지 않는다. 영희와 경민이 터널에서 나눈 짧은 키스의 의미도 감독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순간 소녀들의 표정만을 짧게 비출 뿐이다. 


그것도 동굴 같은 캄캄한 보행자 터널 안에서. 우정과 사랑이라는 낭만이 끼어들기엔 <죄 많은 소녀>가 그리는 세계는 참담하다. 김의석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 이 영화는 “모두가 패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죽음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소녀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바보 같고 무력하다. 그 어른들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소녀들은 자주 패하지만, 영화는 그 소녀들을 통해 누구도 손 내밀어주지 않는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다. 패배가 뻔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역으로 묻는다.


<죄 많은 소녀>가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살아남은 아이>는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부모와 그 죽음에 얼마간 책임이 있는 소년/소녀의 대면이라는 두 영화의 구조는 신기하게도 꼭 닮았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아이>에서도 반복된다. 은찬이 물놀이 도중 친구를 구하고 익사한다. 은찬의 부모는 의사자가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편 그 슬픔을 애도로 승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과정에서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이 살린 친구 기현을 만난다. 기현은 사고 이후 학교를 그만두었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생활한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 중인 아버지 성철은 기현에게 인테리어 기술을 가르치고, 기현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어머니 미숙도 서서히 기현에게 마음을 연다.


사건은 그 이후 터진다. 기현에겐 죄책감이 있다. 아니 죄가 있다. 기현은 자신이 은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라고 덜컥 고백한다. 진실 고백은 고해성사였다. 하지만 기현의 고해성사는 그 누구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은찬의 죽음에 가담한 친구들은 기현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살아주길 바란다. ‘살인자’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것보다는 ‘살아남은 아이’가 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가해자 아이들의 부모 또한 진실을 촉구하는 소년의 부모에게 말한다.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면 아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기억되는 것보다 ‘의사자’로 기억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진실 촉구에 대한 피로도라는 제3자의 언어로 당사자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살아남은 아이>는 언뜻 가해자 학생과 피해자 부모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 같지만 가해와 피해의 경계는 모호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뿐한 선 긋기가 불가능한 상태. 그것은 곧 혼란을 야기한다. 영화는 은찬 부모의 복잡한 심리 변화, 그 혼란을 따라간다. 용서할 수도 증오할 수도 없는 혼란한 마음은 곧 우리의 마음이 다. 또한 사회적 딜레마에 빠진 현실의 반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로 가득한 이 영화는 애도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진실을 마주할 용기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우리가 성숙한 어른이라면 감당하기 벅찬 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커다란 희생과 극단적 슬픔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큰 질문에 영화는 힘겹게 ‘용서’라는 답을 적는다.


<박화영>은 고등학생 박화영의 이야기를 10대의 적나라한 어법으로 풀어낸다. 화영의 집은 또래 친구들의 아지트다. 화영은 집 나온 친구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빨래도 해주고 놀 공간을 제공하면서 ‘엄마’로 불린다. 화영은 연예인으로 활동 중인 얼짱 미정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지만 미정과 화영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미정은 화영을 필요에 의해 이용한다. 뚱뚱하고 허세 가득한 화영을 또래들은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일방적 관계 속에서도 화영은 “나 없었음 어쩔 뻔”이라며 꿋꿋이 웃어젖힌다.


<박화영>은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영화다. 10대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들, 추임새처럼 욕을 사용하는 10대 문화가 낯선 어른에겐 특히 그렇다. 영화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폭력으로 가득하다. 거의 모든 문장이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난다. 대사의 80~90%는 욕이다. 욕, 담배, 침, 구타가 영화의 거의 모든 구성 요소나 다름없는 이 영화의 세계는 이환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과장된 10대의 세계가 아니라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다. 만약 그 세계가 낯설다면 그것은 우리가 미처 눈길 주지 못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죄 많은 소녀>의 김의석 감독도, <박화영>의 이환 감독도 모두 영화 속 10대들의 세계를 다큐멘터리적으로 재현하려 했다고 한다. 그 다큐멘터리적 풍경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 는 것은 다름 아닌 잔인한 폭력이다. 폭력이 만연해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건 힘의 질서다. 또래집단 안에서의 역할놀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원시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화영은 그 또래집단의 계급에서 밑바닥에 머문다. 그러면서도 집단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폭력의 세계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는다. 화영이 두려워하는 건 부모도, 선생도, 경찰도 아니다. 친구 미정과 만나지 못하는 것이며, 또래 친구들이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다. 학교 선생에게도 힘으로 대들던 화영이 무리의 대장 영재의 명령에는 벌벌 떤다. 영화에서 어른들은 그저 우스운 존재, 이용해 먹을 존재일 뿐이다. 아이들은 미성년자와의 불법 성매매를 위해 모텔에 나온 어른들을 홀딱 벗겨 먹는다. 물론 그 일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 중 하나는 화영이 자신의 엄마에게 찾아가 돈을 뜯어내는 장면인데, 동네가 떠나가도록 욕을 퍼붓고 칼을 휘두르면서 난리 치는 패륜의 순간에도 화영은 당당하다. 


이들 세계의 도덕과 윤리는 그저 남의 애인은 탐하지 말라는 것 정도랄까. 하지만 화영은 이상하게 ‘엄마’라는 말에 자부심을 가진다. 화영은 미정에게 “엄마 못 믿냐” “나, 네 엄마야”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칼을 들고 덤비는 딸에게 울면서 돈을 입금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슬픈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려 한다. 그 모순된 상황은 얼핏 이해되지 않는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거나 사랑받아본 기억이 없던 화영은 타인과 수평적 관계 맺기에 성공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는 엄마가 되는 길이 화영에겐 유일한 관계 맺기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박화영>을 보고 나면 폭력에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 속 폭력적 언어와 장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불쾌감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폭력의 체험은 영화 속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혹은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절망’을 바라보는 두 시선


이제는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소공녀>는 성실하게 일 하지만 하루살이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소가 주인공이다.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해 하루에 4만 5천 원을 번다. 일당은 집세, 약값, 밥값, 담뱃값, 위스키값을 내고 나면 남지도 않는다. 급기야 해가 바뀌면서 담뱃값이 무려 2천 원이나 오른다. 남자친구, 담배, 위스키만은 포기할 수 없는 미소는 결국 방을 빼서 친구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한다. 미소가 계란 한 판을 들고 찾아가는 건 대학 시절 밴드 멤버들의 집이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애환이 있어 미소는 친구의 집에도 진득하게 정착하지 못한다.


미소의 형편은 눈물나게 쪼들린다. 냉방이 되지 않는 냉골의 방에서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려다 결국 날이 풀리는 봄까지 유예하기로 하거나, 안락함이라곤 보장되지 않을 것 같은 방이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나 한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돌아서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누추한 현실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되지만 미소는 좀처럼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도리어 미소의 낙천적 태도에 의해 하루살이 인생도, 떠돌이 인생도 견딜만한 것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 영화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로 현실을 돌파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계몽영화일 리는 만무하다.


영화에서 가장 판타지적인 건 미소의 존재지만, 미소로 인해 각박한 현실은 선명히 부각된다. 미소가 오랜만에 만나는 밴드 멤버들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살고 있다. 고단한 삶을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그들에게 미소는 잠시나마 위안의 존재가 된다. 실상 미소가 그들보다 더욱 딱한 처지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추억과 위안을 남기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미소는 어딘지 동화 속 인물 같다. 물론 미소의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때는 밴드 멤버였고 지금은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는 친구는 미소에게 말한다. “염치가 없다”고. “술과 담배를 하는 것도 한심하다”고. 


친구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까지나 술과 담배는 기호품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기호품이 필수품을 대체해도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스타벅스에서 밥보다 비싼 커피를 먹으며 ‘탕진잼’ 놀이에 빠진 세대가 출현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성실히 살아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투자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 미소가 제일 먼저 집을 포기하는 건 비합리

적인 선택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다. <소공녀>는 지금의 청년 세대의 사고와 문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월>은 <소공녀>의 동전의 양면 같은 영화다. <소공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박한 현실을 팬시하게 포장한다면, <이월>은 집 없는 주인공이 부닥칠 수 있는 현실의 민낯을 드러낸다. <소공녀>의 미소와 달리 <이월>의 민경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일들은 나쁜 결과로 누적된다. 민경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다. 월세가 밀려 집을 잃었고, 술 먹고 사고 친 아버지의 사고 합의금을 빚처럼 떠안고 있다. 갈 곳이 없는 민경은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돈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돼 잘리고, 공무원 학원에선 도둑강의를 듣다 쫓겨난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경은 요양 중인 부잣집 친구 여진을 찾아가 신세를 진다. 그곳에서도 문제가 일어나자 이번엔 돈을 받고 성관계를 맺던 애 딸린 남자 진규의 집에 머물기로 한다. 영화에서 민경은 나쁜 결과가 예상되는 나쁜 선택을 반복한다. 최선의 선택도 차선의 선택도 아닌 악수를 둔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 호의를 걷어찬다. 나아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뒤통수까지 친다. 그런 선택과 맞물려 영화에서 민경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건 민경이 돈 얘기를 노골적으로 꺼낼 때다. 


선물받은 원피스를 대놓고 팔겠다고 이야기할 때, 진규와의 성관계 이후 돈을 더 달라고 말할 때 민경은 망설임이 없다. ‘도둑년’으로 내몰려 수모를 겪어도 끝까지 돈만은 고이 챙긴다. 어떻게든 요령으로 현실을 모면하려는 민경

은 꼭 궁지에 몰린 쥐 같다. 궁지에 몰린 쥐는 창피라는 감정, 평판이라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면 차가운 컨테이너 박스에라도 몰래 기어들어가 잠을 자야 한다. 뻔뻔하기까지 한 당당함이 민경의 유일한 무기다. 그 뻔뻔함 은 자존감을 놓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바로 그 한 가닥의 자존감 때문에 실패를 반복하는 민경의 상황은 비참하고 처참한 실패로 다가오지 않는다. 비록 그 끝이 비극이라 하더라도.



한국영화 감독들이 포착한 지금의 대한민국에 해피엔딩은 없어 보인다. 나면서부터 빚을 이고 지는 세대. 폭력적 세상을 너무 일찍 경험한 세대.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10대와 청년세대의 미래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현재의 반복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그 세대를 변호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혹은 예정된 실패와 극단적 절망을 직시하게 하려고.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아픈 세계일지 모른다. 하여 이들의 카메라는 최소한의 희망을 품고 그 세계를 비춘다. 최소한의 희망이 불씨라도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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